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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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으로 부터 200여년 전, 조선 후기라고 불리우는 시기부터 수원백씨의 일부는 전주에 터를 잡아 인재고택2000평외 일대에 집성촌을 이루고 살아가고 있었다.

 학인당 영빈관(본채)은 조선조 성리학자 조광조의 제자이며  대표적 청백리의 한분인 문경공 휴암 백인걸의 11세손 인재 백낙중선생께서 한말(韓末)인 1905년부터 2년8개월동안 현재의 한화가치로 50억원(백미 8,000가마의 공사비와 연인원 4,280명의 공사인원)을 투입하여 1908년에 완공한 조선말 전통 건축 기술을 잘 보여주는 건물이다.

전주는 판소리의 고장으로 조선시대부터 팔도의 내로라하는 소리꾼들은 전주로 몰려들었다. 소리꾼들의 한마당인 전주대사습놀이의 명맥을 잇기 위해, 구한말 전주의 만석꾼인 백낙중선생은 학인당을 건립하고 판소리 공연장으로 만들었다.

판소리 공연을 염두에 두고 지은 학인당영빈관은 우리나라 최초 오페라 극장으로, 구조가 판소리 공연을 할 수 있도록 7개의 들보를 사용한 '칠량(七樑)집'의 2층 높이에 가까운 높은 천장과 100여명의 청중이 모여 명창들의 판소리 공연을 관람할 수 있도록 보통 한옥 4~5채의 크기인 76평 35칸집으로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 세 개의 방문을 들어올리거나 철거하는 방식의 넓은 실내 공간이 있는 구조로 설계되어 있다.

궁중 건축양식을 민간주택에 도입한 한옥으로 방과 방을 연결하는 우물마루의 복도가 설치되어 있고 ‘ㄱ’자 형태의 본채를 돌아다니려면 복도를 따라서 다녀야 하며, 유리로 만든 여닫이문, 서재, 세면장, 목욕탕, 화장실을 갖추었으며 당시 서양의 첨단 시설인 전기 시설과 수도 시설도 도입된 개화기 최신식 전통한옥 주택으로, 부속건물인 행랑방이 붙어 있는 솟을대문도 무척이나 크고 아름답다.

이후 일제강점기 시기 동안 문화예술인들의 후원을 담당하며 임방울 명창 등 내노라하는 분들이 이곳을 거쳐 가셨죠. 또한 해방 이후에는 백범 김구선생을 비롯한 정부요인들의 영빈관으로 사용되었으며, 6.25 전쟁당시에는 공산당 전라북도 도당위원장이 무단점거하여 사택으로도 사용하는 등, 인재고택 학인당은 조선후기부터 근대사에 이르기까지 전주의 역사와 함께하였습니다.

현재 인재 백낙중선생을 기리는 마음으로 남아있는 600여평의 대지를 인재고택이라 명명하고, 그의 5대손인 차종손 부부가 직접 운영하면서 Heritage STAY(고택체험) 및 연간 10회만 진행하는 프라이빗 웨딩&돌잔치, 그리고 인재고택 대표의 재능을 활용한 고택투어&스냅, 단청문양체험을 통하여 우리의 전통문화를 계승 보급하고 있습니다.